2014/03/28

BILL VIOLA

    BILL VIOLA...
    GRAND PALAIS, 5 mars-21 juillet 2014
 


빌 비올라 전시를 보았다. 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보았다. 주말에는 아무래도 붐빌 것 같아서 평일에 갔는데, 다행스러운 선택이었음. 주말이었다면 아마도 불만 가득한 얼굴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빌 비올라는 이미 세계적으로 너무나, 지극히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지만 난 여기 와서 알았다. 백남준의 제자이기도 하다. (서울에 이미 세 차례 정도 다녀갔다. 서울에도 좋은 전시가 많은데, 그때는 회사 다니느라 게을러서 신경을 못 쓴 것뿐이고, 지금 여기에서는 노니까 하루하루가 귀하니까 좋은 전시를 놓치지 않는 걸까. 갑자기 서울에 돌아가서도 부지런해야겠다 싶다.)
무언가에 압도된다는 건 내겐 참 즐겁고 반가운 일인데, 그의 작품을 접하는 순간 그런 감정이 일었다. 물론 대담한 스케일, 스펙터클이 한몫하지만, 특히 '온전히 시간을 견디는 인간의 몸'을 보여주는 작품들에선 쉽게 발이 안 떨어졌다. 물리적 기계적 시간이 아닌, 빌 비올라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만들어낸 극사적(極私的) 심리적 시간의 형상... 그게 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계속 일렁인다. 시간의 일렁임, 출렁임... 마치 환영처럼, 잔상처럼, 그렇게 물의 이미지로 깊이 각인되는 세계. 서사와 다이얼로그, 음악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원시적인 고요, 혹은 그 침묵을 일시에 깨는 외침을 '응시'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근데 어떻게 이름이 비올라일 수가. 이름이 탐나기는 참...)

기억할 만한 작품들...
The Reflecting Pool, 1977-1979
The Veiling, 1995
Catherine's Room, 2001
The Quintet of the Astonished, 2000
Going Forth By Day, 2002
(1. Fire Birth 2. The Path 3. The Deluge 4. The Voyage 5. First Light)
Fire Woman, 2005
Tristan's Ascension, 2005
Three women, 2008

  
    Tristan's Ascension, 2005

    Fire Woman, 2005

UNE BAGUETTE


누군가가 부러 이렇게...해놓은 거 같다.
바게트가 처음부터 저기서 가만히 부패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저 상태로 만든 다음에, 저렇게, 저 자리에.
아니면 그냥 길 위에 나뒹굴던 걸 발견하고는 구조해 놓은 걸지도.
매일 아침 어학원 갈 때마다 지나는 길목인데, 곰팡이 슨 빵이 가만히 누워 있는 걸 보고, 어느 누군가의 작은 의도를 상상하며, 푸힛 웃었다.

2014/03/26

OBJET+LIVRE+PHOTO

    LE BAL ... 6 Impasse de la Défense


지난주 토요일 22일, LE BAL(르 발)이라는 사진 갤러리에 갔다. 영국 사진작가 Martin Parr가 최근 <Le livre de photographies : une histoire volume III>(Phaidon, 2014)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에 관한 강연회가 있었다. 에르베의 친구 시릴이 이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데, 정이씨와 에르베 그리고 나를 초대해주었다. (스키 바캉스 이후 멤버가 처음으로 모였다.)
강연회 테이블에는 마틴 파, 책을 함께 쓴 Gerry Badger, 르 발 갤러리 디렉터, 그리고 갤러리 내에 있는 서점 매니저(인 듯한) 세바스티안, 이렇게 4명이 자리했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영어로 진행되었다.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불어로 진행했어도 거의 못 알아들었을 테고, 이래저래 깊이 있는 이해는 애초에 불가한 자리였는데, 강연회가 끝난 후 에르베의 감상을 들으면서 책에 대한, 사진책에 대한 몇몇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에르베는 사진작가인데 강연이 꽤 흥미로웠다고 하면서 ‘오브제로서의 사진집’을 언급했다. 단순히 사진 작품을 모았기에 책이 된 사진집이 아니라, 책 그 자체로 작품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사진집. 하나의 오브제로서 기능하는 사진집의 존재 가치를 여전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는데, 그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마틴 파의 책도 그러한 사진집에 대한 역사, 이야기, 사례를 기록한 것이다. 에르베의 감상을 엿들은 것으로 이날 강연의 핵심이 정리되었다.
르 발 갤러리에는 꽤 많은 유명 사진집을 볼 수 있는 작은 서점이 있는데, 이런 데서 일하면 참 좋겠단 생각을 했다.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서점이 있고 서점을 지나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동선이다. 큐레이터와 상의하여 사진집을 기획편집하고, 그렇게 만든 책을 갤러리를 찾는 사람들(전시 관람자이자 사진집 독자)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는, 핵심 독자를 바로 만날 수 있는 장소. 빠리 서점에는 정말 귀한 사진집들이 많은데, 내겐 더없이 좋은 기회다. 이 기회를 활용할 체력과 안목이 필요하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가면 책에 관한 어떤 작업들을 할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본 밤이었다.
 
 
    사진작가들은 누군가가 자기를 찍으려 하면 귀신 같이 알아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민첩하게 하얀 기둥 옆으로 스윽 사라진 마틴 파.

VIOLON


하클레트를 먹고 나서 디저트로 클레멍틴(clémentine)을 먹었는데, 빅토르가 까놓은 껍질이 재밌는 거다. 마치 사과를 깎듯이 저렇게 끊김 없이 한번에. 그 껍질을 바닥에 평평하게 펼치고 보니 마치 바이올린에 있는 S자 형 구멍을 닮았다. 빅토르는 어릴 때부터 클레멍틴을 먹을 때 껍질이 끊어지지 않게 살살 벗겨냈고, 그걸 보면서 바이올린을 상상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 있는 빵 조각, 포도주 병마개, 냅킨 등을 동원하여 바이올린 하나를 완성했다. 브라크의 그림 못지않는 콜라주.

2014/03/24

SKI VACANCES


바캉스에서 돌아오자마자 옆구리가 허전했다. 여행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느끼는 그런 허기 비슷한... 나야 뭐 그렇다고 해서 출근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만든 4박 5일 동안의 리듬에서 벗어나고 보니 그리웠던 거 같다. 바캉스로부터 돌아온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어디 한번 소상히 기억을 더듬어보고자... 2014년 3월에 떠난 4박 5일 스키 바캉스.
 
 
3월 16일 목요일 오후 5시 30분 무렵
출발(C'est parti.)
 
이번 바캉스 멤버는 총 4명. 정이씨와 정이씨 부군 에르베, 에르베 친구 시릴, 그리고 나. 2월 초, 정이씨는 겨우 두 번 정도 만난 나에게 바캉스를 제안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제안에 오케이했고. 그러고 보니 새학기에 만난 친구들과 첫 엠티를 떠난 거랑 비슷한 풍경.
파리에서 목적지 론알프스 오트사부아 레꺄호까지는 대략 6~7시간 소요. 목적지에 다다를 무렵 정이씨가 불쑥 묻는다. “근데 희영씨 어떻게 순순히 같이 갈 결정했어요? 우리가 어디 팔아버리면 어쩔라구.” ‘어디 팔아버리면 어쩔라구... 팔아버리면 어쩔라구... 어쩔라구...’ 사방이 깜깜하고 인적 드물고 드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알프스. 허허 웃었지만... 글게... 나 뭘 믿고? 이 깊은 산속까지ㅋㅋ
 
 
3월 17일 금요일
텔레스키(téléski)
 
시릴이 만든 아침으로 바캉스 첫날 배부르게 시작. 시릴은 독립 큐레이터다. 그러면서 그림도 그린다. (그림을 봤는데 다 무제(sans titre)다. 무제가 제목이다. 작품은 여백이 살아있는 추상화. 색을 많이 쓰는 쪽보다는 심플한 구성과 색으로 완성한 작품들이 훨씬 작가의 의도가 잘 사는 듯했다. 동양적인 색감과 필선, 정적인 무드... 나중에 김환기, 서세옥, 이우환, 김호득 등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권해도 좋을 듯. 이미 알고 있다면 반가운 일이고.) 음식도 잘하고, 딱 한번 타봤다는 스키도 잘 타고... 문제가 생기면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나 뚝딱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뭘 해도 기본 이상은 하겠다 싶은 사람. (암튼 바캉스의 모든 아침은 시릴의 음식으로 시작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의 이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음.)
이날 나는 아마도, 충분히, 서른 번 이상은 넘어졌다. 혹독한 스키 신고식. 친구들은 잘 타고 나는 처음이고, 넘어지는 건 당연지사.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텔레스키에서 두 번이나 떨어져서 정말로 지옥훈련을 했다는 것. 텔레스키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니... 스키장에는 총 3개의 이동수단이 있었다. 먼저 텔레카빈(télécabine). 우리가 흔히 케이블카라고 부르는 그것. 4명에서 6명 정도가 함께 타고 이동. 이건 그냥 문이 열리면 잘 타고 잘 내리면 된다. 두 번째는 텔레시에즈(télésiège). 이건 리프트. 4명이 나란히 긴 의자에 앉아서 바람을 느끼며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 또한 잘 앉고 잘 내리면 된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텔레스키(téléski). 이게 난관이었다. 초절정 대참사. 이건 케이블에 연결된 긴 스틱에 달린 원반을 허벅지 사이에 끼고 거기에 몸을 맡기고 신고 있는 스키를 평행 상태로 눈밭에 댄 채 스윽스윽 미끄러지면서 이동하는 수단이다. 절대로 그 원반에 앉으려고 하면 안 된다. 그 작은 원반에 말 그대로 앉으려 하면 넘어지고 살짝 엉덩이만 붙인다는 느낌으로 허벅지에 힘 주고 버티려 하면 목적지까지 순조롭게 가는, 3개의 이동수단 중 가장 간편하고 간단해 보이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스키어에게 가장 주의를 요하는, 암튼 내겐 생소한 도구였던 것이다.
처음 텔레스키는 무사히도 잘 탔다. 심지어 텔레스키에서 내려서 슬라이딩할 때 넘어지지도 않았다. 친구들이 “브라보” 했다. 운동 신경 쓸 만하구나 싶었지만 서른 번은 족히 넘어지고 체력이 바닥을 칠 무렵, 그러니까 스키장 문 닫을 오후 5시가 다가올 무렵, 경사가 심한 언덕을 올라갈 때 나란히 평행을 유지해야 하는 발이 엉키면서 텔레스키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급경사의 눈밭을 스윽 순조롭게 넘을 때 난 걸어서 올라갔다. 내 뒤에 있던 에르베가 떨어지는 나를 보고 함께 슬라이딩. 그가 내 스키를 챙겨들고... 사투의 시작. 힘들어하는 나와 에르베를 위에서 지켜보던 시릴이 결국 그 급경사 언덕을 내려왔고 우리 두 사람을 독려하기 시작. 아 지금 다시 떠올려도 민폐의 끝이 무엇인지 보여준 하루.
숙소로 돌아와 정이씨 부부가 준비한 영화를 봤다. Les bronzés font du ski. 스키장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보여주는 코미디 영환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텔레스키 타는 장면에서 모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텔레스키~희영~"
 
téléski. (사진은 위키에서 퍼옴.)


3월 18일 토요일
하클레트(raclette)

연속으로 스키를 타는 게 무리겠다는 판단에 이날은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 나절에는 친구들에게 가져다줄 주먹밥 만들었고, 점심 나절에는 날씨가 흐렸지만 숙소 주변을 산책하며 느슨하게 보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정이씨의 대학교 은사이신 빅토르가 오면서부터 시작된 저녁식사.(우리가 묵은 숙소의 주인이심.) 산사람들이 즐겨먹는다는 하클레트(raclette)를 먹었다. 하클레트가 뭐인고 하니... 각자에게 주어진 초미니 프라이팬에 햄과 채소와 치즈를 입맛에 맞게 구워서 감자랑 함께 먹는 음식이다. 산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 그런지 상당히 배부르다. 먹다가 지치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포식. 프랑스 사람들 절대로 소식하지 않는다. 많이 먹는다. 그런데도 살찐 사람이 드문 건, 정말 먹는 양 못지않게 말을 많이 한다. 먹으면서 계속 얘기하고, 웃고, 다른 사람 잔에 술이 비지는 않았나 음식이 모자르지는 않나 틈틈이 신경 쓰면서, 그렇게 계속 무언가를 움직이니까 그만큼 에너지를 쓰는 게 아닌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흡족한 상태로 Bonne Nuit.

            
3월 19일 일요일
피카소를 만지다(J'ai touché un Picasso.)

텔레스키의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빅토르 선생님한테 스키를 배우기로 했다. 올해로 일흔이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건강해보이실 수가 없고 유머 넘치시고 여유 있고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분. 정이씨가 전부터 정말 좋은 분이라고, 만나면 재밌을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이 한치의 어긋남 없이 똑 맞아 떨어지는 분이었다. 제일 먼저, 텔레스키는 어떻게 타야 하는가. 빅토르에 의하면, 허벅지로 버티고 텔레스키에 앉지 말라는 것.(Pas s'asseoir!) 그렇게 강의를 듣고 스키를 타기 위해 텔레스키를 타고 이동. 다행히 경사가 심하지 않았기에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도착.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스키 배우기 시작했다. 빅토르 선생님한테 많이 고마운데... 그 고마움을 'merci beaucoup'라는 말로밖에 전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아퓌~ 아퓌~(appuie~ appuie~)". 이 말이 뭐인고 하니, 턴을 할 때 바깥쪽 발을 살짝 비스듬하게 바닥에 기대면서 턴을 하라는 것. 빅토르 샘의 강의를 들으며 같은 언덕을 세 번째 내려올 때는 넘어지지 않고 신나게 내려옴. 우하하.
오후 4시 무렵에는 플렌(Flaine)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정이씨와 에르베가 처음으로 만난 곳이라고 했다. 빅토르는 에르베의 은사이시기도 한데, 학교 다닐 때 에르베의 전시를 플렌에서 했고 그때 정이씨가 전시 개최를 돕기 위해 왔다가... 지금 부부가 되었다고. 두 사람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곳인데, 내가 여기까지 와보게 되었다.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그림 같다라는 말도 진부하고, 눈밭에 뒤비페의 작품이, 피카소의 작품이, 모던한 건축물이, 그렇게 야생과 인공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는 산속 마을. 피카소 조각 작품에 손 한번 대고 와야겠다 싶어서 터치하고 돌아오니 그런 나를 보고 빅토르 샘이 한말씀하셨다. "J'ai touché un Picasso.(나는 피카소 작품을 만졌어요)."

 
3월 20일 월요일
돌아옴, 미드나잇 인 파리(Rentrée, Midnight in Paris)

바캉스 내내 하루 정도만 흐리고 볕이 참 좋았다. le grand soleil. 이 특별한 시간 동안 날씨가 좋았던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가 지금까지 스키를 타지 않고 있었던 건 올해 프랑스 알프스에서 스키의 첫 테이프를 끊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텔레스키의 트라우마와 함께 스키를 배운 것도 넘 잼났고, 플렌이라는 곳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것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고, 멋진 바캉스를 계획하고 초대해준 정이씨와 에르베에게 많이 고맙고, 그리고 바캉스를 함께 보낸 시릴과 빅토르에게도 고맙고... 모든 게 다 다행이고 고맙고.
오후 5시 무렵 출발해서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파리에 도착했다. 눈부시게 하얀 눈이 쌓인 풍경으로부터 가로등 불빛이 진한 도시의 밤 한복판으로. 누군가가 "C'est Paris."라고 말했고, 나는 "Midnight in Paris."라고 말했다.

2014/03/12

mon premier voyage à paris

내일 저녁 5시에 론알프스로 출발한다. 자정 무렵 그곳에 도착해서 일단 자고 이튿날부터 본격적으로 논다. 꽉 채운 나흘을 보내게 되는데 스키를 처음 타는 거라 나흘 내내 타면 몸살 날 거 같아서 이틀만 타기로 했다. 스키는 정이씨가 렌탈 해주는 곳에 이미 예약해주셨고, 스키복은 오늘 저녁 마들렌 역 근처에 있는 스포츠 의류 센터에서 샀다. 서울에서도 산 적 없는 스키복. 12살 키즈용 구매. 주니어용이 성인용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대략 내 몸에도 맞으니까. 올인원 나사 우주복 같은... 모자까지 달려 있어서 아주 좋다. 바지 따로 점퍼 따로 모자 따로 샀으면 가격 살벌했을 텐데... 우주복 30유로, 장갑 10유로, 양말 4유로, 총 44유로로 복장 준비 완료. 그런데 두 팔을 올리면 손목이 시원하고, 앉으면 발목이 시원하고... 내 몸이 딱 알맞은 주니어는 아닌지라 동작 크게 하면 주니어 스키복인 거 단박에 티날 듯. 살짝 아쉬운 건 신발인데... 따시고 튼튼한 등산화 같은 게 있음 딱 좋았을 텐데... 산책할 땐 그냥 운동화 신기로. 정이씨가 빌려주기로 했다.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맙다. 작은 트렁크에 가져갈 짐을 싸는데 역시 설렌다.

2014/03/10

des fleurs

 

꽃만한 게 없다. 무엇보다인지는 모르겠지만...
받고 싶다 꽃.

VERONICA ET PABLO

3월 2일 일요일, 마레에 있는 스웨덴 문화원에서 브런치 약속이 있었다. 정이씨 블로그에서 스웨덴 문화원 브런치가 맛나다는 글을 보고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약속 잡아주셨다. 스웨덴 문화원은 비교적 큰 마당이 있는 ‘ㄷ’ 자 형태의 흰 건물이다. 스프, 샌드위치, 케이크, 커피 이런 구성으로 여유 있게 먹어도 18유로 정도면 만족스런 브런치가 가능하다. 맛도 훌륭하고 공간도 좋고…
이날 정이씨가 3년 전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이탈리아 사진가 베로니카를 소개해줬다. 베로니카 완전 배우 같은 외모…너무 예뻐서 실례였을지 모르겠지만 계속 바라봄. 주로 인물 사진을 찍는데 곧 새로운 촬영을 위해 벨기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이주를 주제로 한 사진을 찍는 중인데 벨기에에 가서 사람들 인터뷰하고 사진도 찍고. 남편 파블로도 매력적이다. 파블로는 클래식 기타리스트이면서 소설도 쓴다. 책이 이미 이탈리아에서 몇 권 나왔다고 한다. 암튼 그도 배우 같다. 잘생겼다기보다는 사람이 풍기는 기운이 그렇다. 안 그래도 내가 배우 같다고, 어느 영화에선가 본 거 같다고, 아마도 그리스 영화, 테오 앙겔로풀로스 영화… 그랬더니 만족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진짜 앙겔로풀로스 영화에서 본 듯한 잿빛 구름 같은 분위기를 가졌다. 예사롭지 않다.
정이씨 부부가 베로니카 파블로와 얘기하는 걸 옆에서 보고 있다가… 그들이 이탈리아 사람이기도 하고 정이씨가 나를 출판사 편집자라고 소개를 했기에, 뭔가 내쪽에서 화제를 하나 던지면 좋겠다 싶어서, 작년에 편집한 이탈리아 책 <상상박물관(il museo immaginato)> 이야기를 꺼냈다. “그 책 알아요? 필리페 다베리오(Philippe Daverio)가 쓴 <상상박물관>?” 그랬더니 바로 안다고 하면서 다베리오가 자기 아버지 친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아버지의 홈페이지를 알려주면서 들어가보라고 한다. 아버지가 조각가다. 작품도 좋다. 아버지의 이름은 알레산드로 리바(Alessandro Riva). 다베리오가 자기 아버지 작품 수집가이고, 구글에 다베리오와 자기 아버지 이름 같이 치면 함께 찍은 사진도 나온다고 알려준다. 자기네 집에 책도 있다고… 그러면서 나중에 한번 초대하겠다고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처럼 같은 라틴계지만 훨씬 자유분방하고 수다스럽고 유쾌해서 재밌는 것 같다. 의자에 앉자마자 이야기하기 시작해서 마가 뜰 틈이 없다. 말 속도도 빠르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도 오픈 마인드. 표정에서 느껴진다. 나도 이탈리아 사람들의 호방함을 말로만 들었지 뭐 지금까지 만나봤어야지. 암튼 곧 클래식 기타 연주 앨범도 나오고, 기념하여 작은 레스토랑에서 공연도 하고…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싶었다. 아 부럽다 이 재능들.
근데 파블로가 오늘 글을 하나 보내줬다. (아마도 자기 소설이 출간되고 있는) 출판사 사이트에 연재하고 있는 콩트 얘기를 한 걸 어렴풋 기억하는데, 그때 그걸 내게 보내주겠다고 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잘 못 알아들으니까… 이메일 주소야 교환했더라도 글을 보내줄지 몰랐는데… 오늘 메일이 이렇게 왔다. “봉주흐 희영, 우리 스웨덴 문화원에서 만났었지. 나 그리스 배우 닮은… 기억해? 여기 약속했던 글이야.” 첨부된 파일을 열어보니 A4 4장짜리 원고. 읽고 싶다 읽고 싶다. 그런데 읽기 넘 어렵다.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글이다. 처음 파일을 열었을 때는 밤을 새서라도 읽고 감상문을 보내야지 했는데 대략 스캔해본 결과, 난 번역가가 아니니까… 그러고 나서 답메일을 보냈다. “봉주흐 파블로,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 당신이랑 베로니카 만나서 즐거웠어. 글 보내줘서 고마워. 나 아직 프랑스어를 잘 못 읽어. 하지만 사전 찾아가면서 읽을게. 아참, 나 베니스 비행기 티켓 예매했어. 4월 17일 떠나서 일주일 동안 머물 예정이야. 정말 기대돼. 고마워 다음에 봐.” (만났을 때 4월 봄방학 때 바르셀로나 갈 생각이라고 했더니, 베니스가 최고라며 유럽의 다른 도시는 안 가도 베니스는 꼭 가야 한다며, 강추… 그래서 지난주말에 베니스행 비행기표 예매.)
암튼 재밌다. 파리에는 정말 예술가가 많이 사는 듯하다. 내가 모르는 얼굴의 예술가들이 얼마나 될까. 길에서 공원에서 카페에서 스쳐지난 사람 중에 수두룩할 것이다. 정말 흥미로운 곳이다.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젊은 시절을 잠시라도 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평생 그 기억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기억이 마치 이동하는 축제처럼 말이다. 근데 정말 솔직하게 느낀 바를 풀어낸 표현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Paris est une fête. 두서없는 이 글은 스웨덴 문화원 브런치 타임에 만난 베로니카와 파블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은 또 파리 칭찬으로 마무리.

2014/03/09

1er, 2ème, 3ème... de cette semaine

 

1. 베트남 비빔국수 BOBUN, 7.50€  (samedi 8 mars, le déjeuner)
: 마레에 있는 SONGHENG이라는 베트남 국수집인데, 뜨거운 국수 PHO와 비빔국숙 BOBUN 딱 두 가지 메뉴만 있다. 물냉 아니면 비냉만 선택할 수 있는 냉면집처럼. 작은 사이즈(petit) 주문했는데도 작지가 않다. 그래서 아주 만족스럽다. 같이 먹은 친구가 냠냠 먹으면서 한마디함. "Le petit n'est pas petit.(작은 게 작은 게 아니야)." 보분 진짜 맛난다. 이 집을 소개해준 친구는 메이(mei)라는 일본인인데, 나보다 14살 어린 22살 대학생이다.(나 22살짜리 조카 있는데...) 암튼 메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를 온니(onni)라고 부른다. 칼칼한 맛과 부대찌개를 좋아하는...조금 재밌는 친군데... 인사말처럼, 혹은 대화 중에 불쑥 "온니~ 부대찌개 주세요~" 한다.



2. 일본 가라아게 9€ & 생맥주 250ml 4€  (jeudi 6 mars, le dîner)
: 피라미드 역 부근에 있는 장사 잘 되는 우동 돈부리 집 SANUKIYA. 정이씨가 치맥 어떠냐고 해서 고고. 간만에 후라이드 치킨이랑 맥주 마시니까 뭐 꿀맛일 수밖에. 그러고 보니 프랑스 사람들은 튀김을 선호하지 않는 듯하다. 마트에도 레스토랑에서도 튀김류는 찾아보기 힘들다. 패스트 푸드라서 그런가. 그야말로 만드는 시간이 별로 안 걸리는 음식, 후다닥 만들어내는 음식이라서? 오븐에서 오랜 시간 구워야 하는데... 그래서 그런가. 양이 적다는 게 한계지만 가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음식임. 파리에서의 치맥. 히히

 

3. 초코파이 크기만한 마카롱, 가격은 모름. 얻어 먹음.  (dimanche 9 mars, le dessert)
: 일요일 오후, 세느 강변에서 피크닉. 야홋. 나는 떡볶이를 만들어서 가져갔는데 역시나 뜨거운 반응이었다. 떡볶이는 충분히 만인의 음식이 될 수 있을 텐데... 빠리에서 떡볶이 식당이나 해볼까. 안국동에 있는 먹쉬돈나 같은... 완전 히트칠 거 같은데... 아야코가 준비해온 대박 사이즈의 마카롱이 등장했을 때 분위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일본인들 특유의 여성스러운 반응 있지 않은가 왜. "오이시소~~(맛나겠다~~)" 나도 옆에서 오이시소~.

Profitez du soleil

 
 

"Profitez du soleil."

프로피테 뒤 솔레이으. 직역하면 "태양을 활용(이용)하라"지만, 태양을 만끽하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번주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이 자주 이 말을 했다. 한동안 내내 흐리고 비오고 춥더니, 이번주는 맑고 화창하고 따뜻하고 아주 그냥 봄 같다. 6일 목요일 오후 3시 무렵 뤽상부흐 정원에도 사람들이 가득. 모두가 볕을 즐긴다. 1월 말에 파리에 온 이후로 이 정원에 사람이 이렇게 많기는 처음이다. 역시 봄이 조금씩 오고 있다.

2014/03/05

la promenade du soir


봄이 오길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여기서 피크닉을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세느 강 어디가 돗자리 펴고 피크닉 즐기기 좋을지 강변을 지나게 되면 매의 눈으로 각을 재는 습성이 생겼다. 어제 해가 저물 무렵 산책 나갔다가 다시 봐도 명당이구나 싶었다. 세느 강에는 두 개의 작은 섬이 있다. 시테 섬과 생 루이 섬. 시테 섬에는 노트르담 성당이 있고 생 루이 섬에는 작은 상점들과 맛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면 이곳에 도착한다. 노트르담 성당의 앞모습이 육중한 남자의 몸이라면 뒷모습은 곡선의 디테일이 강한 여자 몸 같다. 이쪽 강변에서 노트르담 성당의 아름다운 뒤태를 보면서 봄의 피크닉을 여러번 즐기고 싶다.

Je mange beaucoup trop


서울에서도 별로 없던 식탐이 여기서 생겼다. 식탐이라기보다는 왕성한 식욕이라고 할까. 암튼 배꼽시계가 울리면 뭘 먹어야 한다. 평소 먹던 양보다 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일단 빠리 거리엔 맛있는 빵집이 서울에 편의점 있듯이 있다. 간혹 맛이 별로인 집도 있지만 정말 드물다. 대개 기본은 한다는 게,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게 사먹는 입장에서는 안심이다. 쇼윈도, 프랑스어로는 비트린(vitrine)이라고 하는데, 일단 비트린 너머 보이는 먹음직스런 빵이나 갸또(gâteau, 조각 케이크나 단맛이 강한 파이 등, 무지하게 쁘띠하고 사랑스러운 디저트)를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다. 단맛을 그닥 즐기지 않았던 나인데... 여기선 그 맛에 눈뜨고 있다. 이와 더불어, 특히 달디 단 과일잼에 빠졌다. 아침마다 생크림과 과일잼(특히 무화과로 만든)을 3 대 1 비율로 준비하고 식빵이 구워지면 얹어 먹는다. 아침을 이렇게 먹고 점심도 거의 빵이다. 샌드위치 아니면 달팽이처럼 생긴 빵(그리하여 이름 또한 에스카르고. 빵에 쇼콜라를 넣느냐 건포도를 넣느냐에 따라 에스카르고 오 쇼콜라escargot aux chocolats, 에스카르고 오 헤장escargot aux raisins이라고 부른다.)을 주로 먹는다. 그리고 저녁은 약속이 있으면 여지없이 술에 육식을 하고, 약속이 없어도 맛난 맥주를 한잔한다. 르페 블롱드(Leffe blonde)가 요즘 즐겨 마시는 맥주. 살짝 단맛이 도는데 풍성한 거품이 꽤 오래 가서 좋다. 서울에서 레드와인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여럿 있어서 아직은 조심하고 있지만 그 빗장이 언제 풀릴지는 모를 일. 암튼 이렇게 먹는 일이 많고 먹는 양이 평소보다 늘다 보니, 몸무게도 자연스럽게 늘었다. 바지가 꽉 끼기 일보직전이라 조깅이라도 해야 할 듯. 지금 나의 식욕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억압할 일은 아닌 거 같고, 어차피 공원도 많겠다 뛰는 게 참 좋은 생각이긴 한데, 뛴다는 게 또 내겐 생경한 일이라... 시간과 템포를 정해놓고 빨리 걷는 게 어떨까 싶다. 슬슬 봄도 오는 듯하고... 당장 내일부터 시작해볼까. 미루는 일 없이.

2014/03/01

Untitled


누군가를 위한 작은 약속처럼
그렇게 얌전하게 놓인 운동화.
그 약속을 아는 누군가가 데려가기 전
때마침 내 눈에 포착된 타이밍.

trompe-l'œil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자세히 보니 깨알같은 재치가...^^

트롱프뢰유(trompe-l'œil)라는 미술 용어가 있다.
뜻을 풀이하면 '눈속임 그림', 실제와 너무 똑같이 그리는 것은 물론이고
보는 이가 쉽게 착각할 수밖에 없는 트릭을 이용한 그림...
늦은 오후, 미술관이 아닌 거리에서 만난 작품.

Comme Saul Leiter


마치 솔 리터(Saul Leiter)처럼...

집에서 나올 땐 맑았는데 팡테옹을 지나 노트르담 성당에 이를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
이제 뜬금없이 내리는 비에 익숙해졌는지 나 가던 길 간다 식으로 묵묵히 걸어가는데
에잇 먹구름이 내 뒤를 좇는 건지 좀체 잦아들질 않아서 오늘의 목적지 퐁피두 센터를 목전에 두고 공중전화 부스로 피신.
그 안에서 빗방울 약해지길 기다리며 서성이다가 갑자기 솔 리터 생각이 나서 찍은 사진.
어딘가 좀 그의 사진과 비슷한 느낌 날까 싶어서 유리 너머 어렴풋, 그런...
턱없이 안 살지만...그래도 문득 짧은 순간 생각난 솔 리터 때문에 짧은 메모로 남겨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