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캉스에서 돌아오자마자 옆구리가 허전했다. 여행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느끼는 그런 허기 비슷한... 나야 뭐 그렇다고 해서 출근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만든 4박 5일 동안의 리듬에서 벗어나고 보니 그리웠던 거 같다. 바캉스로부터 돌아온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어디 한번 소상히 기억을 더듬어보고자... 2014년 3월에 떠난 4박 5일 스키 바캉스.
3월 16일 목요일 오후 5시 30분 무렵
출발(C'est parti.)
이번 바캉스 멤버는 총 4명. 정이씨와 정이씨 부군 에르베, 에르베 친구 시릴, 그리고 나. 2월 초, 정이씨는 겨우 두 번 정도 만난 나에게 바캉스를 제안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제안에 오케이했고. 그러고 보니 새학기에 만난 친구들과 첫 엠티를 떠난 거랑 비슷한 풍경.
파리에서 목적지 론알프스 오트사부아 레꺄호까지는 대략 6~7시간 소요. 목적지에 다다를 무렵 정이씨가 불쑥 묻는다. “근데 희영씨 어떻게 순순히 같이 갈 결정했어요? 우리가 어디 팔아버리면 어쩔라구.” ‘어디 팔아버리면 어쩔라구... 팔아버리면 어쩔라구... 어쩔라구...’ 사방이 깜깜하고 인적 드물고 드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알프스. 허허 웃었지만... 글게... 나 뭘 믿고? 이 깊은 산속까지ㅋㅋ
3월 17일 금요일
텔레스키(téléski)
시릴이 만든 아침으로 바캉스 첫날 배부르게 시작. 시릴은 독립 큐레이터다. 그러면서 그림도 그린다. (그림을 봤는데 다 무제(sans titre)다. 무제가 제목이다. 작품은 여백이 살아있는 추상화. 색을 많이 쓰는 쪽보다는 심플한 구성과 색으로 완성한 작품들이 훨씬 작가의 의도가 잘 사는 듯했다. 동양적인 색감과 필선, 정적인 무드... 나중에 김환기, 서세옥, 이우환, 김호득 등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권해도 좋을 듯. 이미 알고 있다면 반가운 일이고.) 음식도 잘하고, 딱 한번 타봤다는 스키도 잘 타고... 문제가 생기면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나 뚝딱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뭘 해도 기본 이상은 하겠다 싶은 사람. (암튼 바캉스의 모든 아침은 시릴의 음식으로 시작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의 이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음.)
이날 나는 아마도, 충분히, 서른 번 이상은 넘어졌다. 혹독한 스키 신고식. 친구들은 잘 타고 나는 처음이고, 넘어지는 건 당연지사.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텔레스키에서 두 번이나 떨어져서 정말로 지옥훈련을 했다는 것. 텔레스키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니... 스키장에는 총 3개의 이동수단이 있었다. 먼저 텔레카빈(télécabine). 우리가 흔히 케이블카라고 부르는 그것. 4명에서 6명 정도가 함께 타고 이동. 이건 그냥 문이 열리면 잘 타고 잘 내리면 된다. 두 번째는 텔레시에즈(télésiège). 이건 리프트. 4명이 나란히 긴 의자에 앉아서 바람을 느끼며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 또한 잘 앉고 잘 내리면 된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텔레스키(téléski). 이게 난관이었다. 초절정 대참사. 이건 케이블에 연결된 긴 스틱에 달린 원반을 허벅지 사이에 끼고 거기에 몸을 맡기고 신고 있는 스키를 평행 상태로 눈밭에 댄 채 스윽스윽 미끄러지면서 이동하는 수단이다. 절대로 그 원반에 앉으려고 하면 안 된다. 그 작은 원반에 말 그대로 앉으려 하면 넘어지고 살짝 엉덩이만 붙인다는 느낌으로 허벅지에 힘 주고 버티려 하면 목적지까지 순조롭게 가는, 3개의 이동수단 중 가장 간편하고 간단해 보이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스키어에게 가장 주의를 요하는, 암튼 내겐 생소한 도구였던 것이다.
처음 텔레스키는 무사히도 잘 탔다. 심지어 텔레스키에서 내려서 슬라이딩할 때 넘어지지도 않았다. 친구들이 “브라보” 했다. 운동 신경 쓸 만하구나 싶었지만 서른 번은 족히 넘어지고 체력이 바닥을 칠 무렵, 그러니까 스키장 문 닫을 오후 5시가 다가올 무렵, 경사가 심한 언덕을 올라갈 때 나란히 평행을 유지해야 하는 발이 엉키면서 텔레스키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급경사의 눈밭을 스윽 순조롭게 넘을 때 난 걸어서 올라갔다. 내 뒤에 있던 에르베가 떨어지는 나를 보고 함께 슬라이딩. 그가 내 스키를 챙겨들고... 사투의 시작. 힘들어하는 나와 에르베를 위에서 지켜보던 시릴이 결국 그 급경사 언덕을 내려왔고 우리 두 사람을 독려하기 시작. 아 지금 다시 떠올려도 민폐의 끝이 무엇인지 보여준 하루.
숙소로 돌아와 정이씨 부부가 준비한 영화를 봤다. Les bronzés font du ski. 스키장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보여주는 코미디 영환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텔레스키 타는 장면에서 모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텔레스키~희영~"
téléski. (사진은 위키에서 퍼옴.)
3월 18일 토요일
하클레트(raclette)
연속으로 스키를 타는 게 무리겠다는 판단에 이날은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 나절에는 친구들에게 가져다줄 주먹밥 만들었고, 점심 나절에는 날씨가 흐렸지만 숙소 주변을 산책하며 느슨하게 보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정이씨의 대학교 은사이신 빅토르가 오면서부터 시작된 저녁식사.(우리가 묵은 숙소의 주인이심.) 산사람들이 즐겨먹는다는 하클레트(raclette)를 먹었다. 하클레트가 뭐인고 하니... 각자에게 주어진 초미니 프라이팬에 햄과 채소와 치즈를 입맛에 맞게 구워서 감자랑 함께 먹는 음식이다. 산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 그런지 상당히 배부르다. 먹다가 지치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포식. 프랑스 사람들 절대로 소식하지 않는다. 많이 먹는다. 그런데도 살찐 사람이 드문 건, 정말 먹는 양 못지않게 말을 많이 한다. 먹으면서 계속 얘기하고, 웃고, 다른 사람 잔에 술이 비지는 않았나 음식이 모자르지는 않나 틈틈이 신경 쓰면서, 그렇게 계속 무언가를 움직이니까 그만큼 에너지를 쓰는 게 아닌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흡족한 상태로 Bonne Nuit.
3월 19일 일요일
피카소를 만지다(J'ai touché un Picasso.)
텔레스키의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빅토르 선생님한테 스키를 배우기로 했다. 올해로 일흔이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건강해보이실 수가 없고 유머 넘치시고 여유 있고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분. 정이씨가 전부터 정말 좋은 분이라고, 만나면 재밌을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이 한치의 어긋남 없이 똑 맞아 떨어지는 분이었다. 제일 먼저, 텔레스키는 어떻게 타야 하는가. 빅토르에 의하면, 허벅지로 버티고 텔레스키에 앉지 말라는 것.(Pas s'asseoir!) 그렇게 강의를 듣고 스키를 타기 위해 텔레스키를 타고 이동. 다행히 경사가 심하지 않았기에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도착.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스키 배우기 시작했다. 빅토르 선생님한테 많이 고마운데... 그 고마움을 'merci beaucoup'라는 말로밖에 전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아퓌~ 아퓌~(appuie~ appuie~)". 이 말이 뭐인고 하니, 턴을 할 때 바깥쪽 발을 살짝 비스듬하게 바닥에 기대면서 턴을 하라는 것. 빅토르 샘의 강의를 들으며 같은 언덕을 세 번째 내려올 때는 넘어지지 않고 신나게 내려옴. 우하하.
오후 4시 무렵에는 플렌(Flaine)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정이씨와 에르베가 처음으로 만난 곳이라고 했다. 빅토르는 에르베의 은사이시기도 한데, 학교 다닐 때 에르베의 전시를 플렌에서 했고 그때 정이씨가 전시 개최를 돕기 위해 왔다가... 지금 부부가 되었다고. 두 사람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곳인데, 내가 여기까지 와보게 되었다.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그림 같다라는 말도 진부하고, 눈밭에 뒤비페의 작품이, 피카소의 작품이, 모던한 건축물이, 그렇게 야생과 인공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는 산속 마을. 피카소 조각 작품에 손 한번 대고 와야겠다 싶어서 터치하고 돌아오니 그런 나를 보고 빅토르 샘이 한말씀하셨다. "J'ai touché un Picasso.(나는 피카소 작품을 만졌어요)."
3월 20일 월요일
돌아옴, 미드나잇 인 파리(Rentrée, Midnight in Paris)
바캉스 내내 하루 정도만 흐리고 볕이 참 좋았다. le grand soleil. 이 특별한 시간 동안 날씨가 좋았던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가 지금까지 스키를 타지 않고 있었던 건 올해 프랑스 알프스에서 스키의 첫 테이프를 끊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텔레스키의 트라우마와 함께 스키를 배운 것도 넘 잼났고, 플렌이라는 곳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것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고, 멋진 바캉스를 계획하고 초대해준 정이씨와 에르베에게 많이 고맙고, 그리고 바캉스를 함께 보낸 시릴과 빅토르에게도 고맙고... 모든 게 다 다행이고 고맙고.
오후 5시 무렵 출발해서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파리에 도착했다. 눈부시게 하얀 눈이 쌓인 풍경으로부터 가로등 불빛이 진한 도시의 밤 한복판으로. 누군가가 "C'est Paris."라고 말했고, 나는 "Midnight in Paris."라고 말했다.
♥ 어디에 팔아야 쓸까, 요 쁘티 동양 친구를..
답글삭제결과론적이긴 해도 인연은 무모해야 되는 거 같아. 누군가를 믿고 좋아하게 된다는 건, 정말 무모한 일이잖아!
정이씨 고맙습니다~
그니까...어디에 팔아야 쓸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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